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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제 니들건 M/62 <출처: Public Domain>

 

 

 

개발의 역사

 

인류가 총을 개발한 이래 19세기까지 절대다수의 총은 전장식, 즉 총구로부터 탄과 화약을 밀어 넣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19세기부터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다. 강선이 서서히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강선의 효율을 최대한 높이려면 약실로부터 탄이 강선에 맞물리게 하는 후장식이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졌고, 또 뇌관식 격발 기구가 개발되면서 예전보다 더 콤팩트한 격발 기구를 총열 바로 뒤쪽에 위치하게 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1830년대에 독일의 요한 니콜라우스 드라이제(Johann Nikolaus Dreyse)라는 총기 설계자는 처음에는 전장식 총이지만 발사 속도를 매우 빠르게 하는 총을 설계했다. 탄과 화약은 물론 뇌관까지 종이로 된 꾸러미(일종의 종이 탄피)에 묶어 한 묶음이 된 ‘탄약’으로 만들고, 그것을 통째로 총구로부터 밀어 넣는 것이다. 그러면 약실 바로 뒤에 있는 긴 바늘 모양의 공이가 종이 탄피를 찔러 그 안에 있는 뇌관을 타격, 격발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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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제의 생전 모습(좌)과 독일 쉐메르다에 위치한 드라이제의 동상(우) <출처: Public Domain>

 

 

하지만 설계 과정에서 그는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의 시대에는 군용 소총의 주류가 활강총에서 강선총으로 막 넘어가려는 참이었다. 그렇다면 강선총에 유리하게 탄을 약실로부터 넣는 활강식으로 바꾸면 어떨까? 그는 이를 위해 약실에 노리쇠(영어로는 Bolt)를 설치했다. 손잡이를 조작해서 노리쇠를 뒤로 당겨 약실을 열어둔 다음 그곳에 종이 탄피식 탄약을 밀어 넣은 다음 다시 노리쇠를 조작해 닫고 방아쇠를 당겨 사격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드라이제는 단번에 세 가지 위업을 달성했다. 실용적인 후장식 군용 소총을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실용적인 볼트액션 소총, 그리고 실용적인 ‘완성형 탄약’, 즉 예전처럼 탄약포를 찢어 화약과 탄을 따로 넣고 뇌관을 따로 끼우는 등의 격발 준비도 따로 할 필요 없이 그냥 탄약 한 덩어리만 통째로 넣고 닫으면 끝나는 방식의 새로운 탄약을 사용하는 소총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세 요소를 한 번에 조합해 실용적인 총으로 완성시킨 것은 아마도 드라이제가 최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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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제는 탄환식의 후장식 볼트액션 소총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출처: Public Domain> 

 

 

1840년에 그는 당시만 해도 아직 통일 국가가 아니던 독일 지역의 가장 강력한 왕국인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4세 앞에서 자신의 총을 테스트했고, 그 테스트 결과는 매우 양호했다. 기존에 사용하던 1839년형 포츠담 뇌관식 소총과 비교해 드라이제의 소총은 확실히 유리했다. 

 

프로이센 국왕은 드라이제의 소총을 ‘1841년형 드라이제 소총’ 6만 정의 도입을 명령했고, 이것으로 유럽 주요국으로는 최초로 후장식 소총을 정식 채택한 국가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것이 독일과 유럽의 역사에 중요한 변화를 끼치게 된다. 유명한 ‘드라이제 니들건’이 탄생한 것이다. 

 

 

특징

 

드라이제 ‘니들건 Needle Gun’(영어: 독일어로는 Zuendnadelgewehr, 즉 ‘바늘 격발식 총’)은 매우 긴 공이로 격발을 시키는 방식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냥 길고 가늘기 때문에 ‘바늘’이라고 불린 게 아니라, 종이로 된 탄피를 깊숙이 찔러 들어가 탄두 밑에 있는 뇌관을 타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탄피의 소재가 종이였기 때문에 탄피 그 자체에 뇌관을 설치하면 뇌관이 제대로 타격을 받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긴 바늘 모양 공이를 니들건의 약점이기도 한데, 실제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이는 비교적 자주 교체해야 했고 영국의 테스트에서는 겨우 12발에 한 번 바꿔야 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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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발 기구 부품 및 탄약. 긴 바늘 모양의 부품이 공이다. <출처: Public Domain>

 

 

 

물론 이 문제도 꾸준히 개량되어 1860년대에는 200발에 한번 꼴로 교체하는 정도로 개선되었지만 그 뒤로도 전투 전에 프로이센군 병사들은 새 공이 두 개를 지급받았다고 할 만큼 일종의 소모품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고, 야전에서도 30초 이내에 교체가 가능하게끔 훈련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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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제 탄약. 2번이 탄두, 3번이 탄두를 받쳐주는 받침대, 4번이 뇌관, 5번이 추진 장약, 7번이 공이. 공이가 종이 탄약포와 추진 장약(화약)을 뚫고 지나가 뇌관을 찔러 격발이 이뤄진다. <출처: Public Domain> 

 

 

또 다른 문제는 당시의 흑색 화약은 탄매가 엄청나게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수십 발 사격하면 공이 용수철까지 탄매가 끼어 격발 불량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보통 60-80발 정도를 사격하면 청소가 필수적이었다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시의 병사들은 그보다 적은 양의 탄약을 휴대했기 때문에 보통 자기 탄약을 다 쏘면 총을 청소하고 -비록 분해 조립이 쉬운 총은 아니었지만, 잘 훈련받은 병사들은 약 10분 안에 가능- 탄약을 재지급 받으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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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크의 개량이 적용된 드라이제 니들건의 내부. 1번이 고무 0링으로,

가스 누출 문제를 어느 정도 완화시켰다. <출처: Public Domain> 

 

 

이 총의 또 다른 특징은 볼트액션 방식이라는 것이었다. 볼트액션 방식은 문을 잠그는 빗장에서 힌트를 얻어 발명되었다고 전해진다. 빗장처럼 손잡이를 움직여 노리쇠를 뒤로 당기고 앞으로 밀어 열고 닫는 것인데, 실제로 드라이제의 첫 볼트액션은 마치 빗장처럼 노리쇠를 닫으면 그것을 후퇴하지 못하게 잠가주는 부분은 사실상 장전손잡이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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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단면도. 노리쇠 내부의 공이는 노리쇠를 후퇴시켰다 다시 전진시키면 후퇴된 채 머무르며

방아쇠를 당기면 공이가 전진해 격발이 이뤄진다. <출처: Public Domain> 

 

 

사실 드라이제의 니들건은 당시의 군용 소총 상식에서 보면 매우 복잡하고, 생산성도 떨어지고, 비싸고, 심지어 사거리에서도 불리했다. 강선이 없는 활강식 머스킷이 아직 보편적이던 1830년대에는 강선총인 드라이제의 명중률과 사거리가 우월했겠지만, 미니에탄이 보급되면서 오히려 전장식 머스킷보다 사거리와 명중률은 낮아지는 역전 현상이 벌어졌다. 후장식인데 약실과 노리쇠 사이의 밀폐가 완벽하지 못해 화약의 폭발 가스가 새어 나갔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든 완화하기 위해 드라이제는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완벽하게 대처하지는 못했다. 1849년부터 1851년 사이에 영국군이 실시한 평가에서도 드라이제는 프랑스의 미니에 라이플보다 종합적으로는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 때문에 영국군 주력이 전장식인 엔필드 P51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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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교범에 나와있는 조작법 해설도 <출처: Public Domain> 

 

 

하지만 드라이제에는 아주 중요한 장점이 있었다. 일단 발사 속도가 빠르기는 했지만, 1분에 6발이라는 평균 속도는 전장식의 소총들보다 약간 빠른 정도로 이론상 엄청난 수준은 아니었다(뇌관식 전장식 소총은 분당 3~4발). 하지만 진짜 중요한 점은 이 속도가 전장식 소총보다 전장에서도 비교적 쉽게 유지된다는 점, 무엇보다도 “은/엄폐된 상태에서도 재장전이 된다”는 점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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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57 기병총의 장전손잡이 <출처: Public Domain>

 

 

 

후장식인 데다 완성된 탄약으로 장전되는 드라이제는 일단 발사 속도가 잘 유지됐고 전장의 혼란 속에서도 비교적 쉽게 재장전이 가능했다. 탄약포를 꺼내 그걸 찢어서 화약과 탄을 따로 넣고 뇌관을 따로 끼워야 하는 전장총은 전장의 혼란 속에서 뇌관 끼우는 걸 잊어버리거나 하는 등으로 장전 과정이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고, 실제로 남북전쟁 등의 전장에서 발굴된 소총 중에는 몇 발씩이나 중복 장전된 소총이 종종 있다. 하지만 드라이제 소총은 불발된 상태에서 그걸 모르고 재장전 하려고 해도 약실에 탄이 버젓이 들어있으니 중복 장전 가능성이 낮고, 또 탄약 하나만 통째로 넣으면 되니 실수의 여지도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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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대의 대표적인 후장식 소총 탄약. 왼쪽부터 드라이제, 샤스포, 스펜서. <출처: Public Domain> 

 

 

무엇보다 전술적으로 엄청난 강점은 은/엄폐 상태에서의 장전과 발사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전장식 총기는 빠르고 효율적으로 장전하려면 아무래도 서 있는 상태에서 장전해야 했다. 미리 서 있는 상태에서도 숨을 수 있는 엄폐물이 준비되었다면 모를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재장전을 위해 병사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일쑤였다. 그렇지 않다면 발사 속도는 현저히 떨어졌다. 1.3m가 넘는 당시의 소총을 총구에서 탄을 밀어 넣으려면 서있지 않고 앉거나 엎드린 상태에서는 아주 불편하고 시간도 많이 걸릴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반면 드라이제의 니들건은 자세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고 신속하고 편한 재장전이 가능했다. 엄폐물이 없으면 엎드려쏴 자세로도 연속 사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Forgotten Weapons의 M/60 분해 및 해설 <출처: 유튜브 Forgotten Weapons 채널>
 
 

프로이센군이 재정의 압박과 낮은 초반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이 총을 포기하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전술적인 강점 때문이었고, 나중에 이 점은 실전에서 엄청난 강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물론 1840년대부터 1860년대 사이의 약 20년 사이에 금속 소재 기술 및 가공 기술, 생산 기술이 모두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처음에는 어려웠던 이 총의 양산이 시간이 지나면서 비교적 쉬워졌다는 시대적인 배경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운용의 역사 

 

1841년에 정식 채택된 총이지만, 막상 프로이센 및 다른 독일 제후국들에서의 보급 속도는 지지부진했다. 1848년에도 1841년형 소총의 생산량은 45,000정에 불과했다. 이미 생산 체계가 확립되고 노하우가 수백 년 간 쌓여있던 전장식 소총과는 판이하게 다른 볼트액션식 니들건은 값도 비싸고 복잡해 생산성이 떨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프로이센의 예산 사정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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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의 프로이센-덴마크 전쟁 당시 우군이던 오스트리아군에게 드라이제 니들건에 대해 설명하는

프로이센군 병사들 <출처: Public Domain> 

 

 

하지만 실전에서 일단 주목받기 시작하자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다. 1848~49년 사이에 비록 외국의 침략은 아니지만 독일 국내에서 일어난 혁명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드라이제가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특히 이 혁명들의 절대다수는 시가지에서 발생했고, 시가전에서 은/엄폐 시 재장전이 쉬운 드라이제는 혁명 세력이 주로 사용하던 구형 머스킷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물론 그렇다고 단번에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1855년까지만 해도 프로이센군에서 드라이제로 무장한 병력은 90개 대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1853년부터 생산이 드라이제가 운용하는 공장뿐 아니라 프로이센 왕국의 슈판다우 조병창에서도 시작되었고, 그 뒤를 이어 단치히, 자른, 에르푸르트에서도 생산이 시작되었다. 슈판다우 공장은 처음에는 1년에 12,000정의 소총을 생산했으나 1867년에 이르면 그 숫자는 48,000정으로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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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전장총으로 돌격하는 덴마크군의 8여단의 모습. 물론 덴마크군은 니들건을 보유한 프로이센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Vilhelm Rosenstand의 1894년 작품. <출처: Public Domain>

 

 

 

1859년부터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1859~1863년 사이에 빌헬름 1세와 폰 몰트케에 의한 육군 개혁이 시작되면서 예산이 25%나 늘어났고, 총열 생산 공정이 개선되면서 생산량도 크게 늘어나게 된다. 특히 개량형인 1862년형 드라이제 소총이 등장하면서 보급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덕분에 프로이센 육군 일선 병력의 대다수를 무장시킬 수 있었다. 1870년에 이르면 프로이센군에는 1,150,000정의 드라이제 니들건이 배치되어 명실공히 주력 소총의 지위를 자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처럼 신형 소총이 대거 보급되었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운용되면서 운용 노하우를 충분히 쌓은 것은 1860년대에 독일이 벌인 여러 전쟁에서 엄청난 강점으로 다가왔다. 대표적인 것이 1866년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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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니히그레츠 전투를 묘사한 Carl Rochling 작품. 프러시아군의 니들건이 잘 묘사되었다. <출처: Public Domain>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군의 거의 3배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참패했는데, 이렇게 된 중요한 원인이 바로 총기였다. 오스트리아군이 사용하던 전장식 로렌츠 라이플은 사거리와 명중률은 어떨지 몰라도 연사 능력과 은/엄폐 사격 능력은 드라이제의 상대가 아니었다. 사실 이론적인 사거리는 어떨지 몰라도 실제 교전이 이뤄지는 거리 안에서는 두 총의 격차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반면, 프로이센 병사들은 엎드린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1분에 5~6발의 발사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오스트리아 병사들은 1분에 3발 정도를 쏘려고 해도 선 채로 재장전해야 했던 것이다. 누가 더 쉽게 총에 맞았을지는 뻔한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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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형 로렌츠 소총.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군에게 패배할 당시 주력 소총이었다. <출처: Public Domain>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그보다 먼저(1864년) 벌어진 덴마크와의 전쟁에서도 드라이제의 니들건은 프로이센군에 중요한 우위를 제공했는데, 그다음에 니들건이 활약한 전장이 바로 프랑스와의 전쟁이었다. 1870~71년의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군의 주력 소총으로 활약한 것이다.

 

하지만 보불전쟁에서 드라이제 니들건은 이전의 전쟁과 같은 우위를 제공하지 못했다. 프랑스도 이 시기에 주력 소총으로 비슷한 니들건인 샤스포(Chassepot)를 사용했던 것이다. 비록 프로이센군이 승리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총 덕을 봤다’고 하기는 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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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은 샤스포를 준비하여 소총에 있어서만큼은 독일의 니들건에 뒤지지 않았다. 사진은 샹피니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분전을 묘사한 Édouard Detaille의 작품이다. <출처: Public Domain> 

 

 

1866년에 처음 도입된 샤스포는 사실 여러 면에서 드라이제보다 우월한 총이었다. 애당초 개발 자체가 프로이센의 니들건에 위기감을 느껴 시작되었고 개발 과정에서도 드라이제의 총을 강하게 벤치마킹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사거리와 명중률도 드라이제보다 우월했다. 솔직히 소총만 놓고 보면 프랑스의 비교우위였다. 하지만 프로이센군은 더 오랫동안 이 총을 운용해온 덕분에 운용 노하우가 더 많이 쌓여있었고, 또 전체적인 병력의 훈련 수준이나 지휘관의 자질 등 많은 다른 면에서 프랑스군보다 우세했다. 개별적인 무기의 우열도 중요하지만 그 무기를 쓰는 사람의 수준 역시 승패를 좌우한다는 좋은 사례를 보여준 셈이다.

 

그리고 보불전쟁이 끝나자 프로이센은 재빨리 주력 소총을 신형 소총인 마우저 M1871로 바꾼다. 이미 시대가 금속 탄피를 사용하는 쪽으로 빠르게 옮겨가는 마당에 종이 탄피를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드라이제 소총이 다른 나라들로 팔려나갔고, 루마니아에도 약 3만 정이 흘러나가 루마니아 독립전쟁에서 크게 활약했다.

 

 

 

드라이제 M1841의 실사격 및 조작 영상
 

정확히 숫자가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숫자의 1862년형 드라이제 소총이 막부 말기의 일본에도 흘러나갔다. 또 중국도 상당수의 드라이제를 구입해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일본은 프로이센의 영향을 적잖이 육군 쪽에서 받은 탓에 1870년대 후반까지도 일본군에서 현역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일본 국산인 무라타 소총이 나올 때까지 일본군이 사용한 3대 후장식 소총(스나이더, 샤스포, 드라이제)에도 포함되었으며, 이 총들의 대부분이 폐기된 것은 거의 20세기 초반의 일이라고 전해진다. 

 

 

파생형 

 

드라이제는 생산이 거의 30년이 지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파생형이 나왔다. 1841년, 1849년, 1854년, 1855년, 1857년, 1860년, 1862년, 1865년, 심지어 1869년에도 개량 및 변형이 등장하는 등 그 파생형의 역사를 한 번에 정리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독일어 위키피디아 등의 자료를 토대로 한번 정리해보자.

 

* M/41

최초 형태. 기본이라 할 수 있다. 탄약의 개량에 따라 47년과 55년에 가늠자의 개량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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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년형 드라이제 소총(M/41) <출처: Public Domain>

 

 

* M/49

노리쇠 작동 거리가 25cm에서 15cm 정도로 짧아졌고 약실 밀폐성을 높이기 위한 디자인 개량이 이뤄졌다. 최소한 사수의 얼굴로 화약 가스가 뿜어지는 건 막았다고 한다. 소수가 정예부대에서 시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 M/54

이 모델부터 총열이 주철을 이용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 프로이센의 소총으로는 최초로 가늠자가 거리에 따른 조절 기능이 추가되었다. 프로이센 해군에 도입.

 

* M/55, M/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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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57 기병총 <출처: Public Domain>

 

 

* M/60

M/41기준으로 총열을 약 12cm 단축했다.

 

* M/62

M/41을 대체하기 위해 1862년에 등장한 모델. 가장 널리 보급된 모델이다. 총열이 M/41보다 6.5cm 단축되었으며 가늠자 등도 개량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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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은 양이 보급된 M/62 <출처: Public Domain>

 

 

 

* M/65

일종의 특수부대에 가까운 성격을 지닌 엽병(Jaeger) 부대를 위한 총으로, 정밀 사격을 위해 방아쇠 압력 조절이 가능한 2중 방아쇠(앞의 방아쇠를 당겨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뒤의 방아쇠로 격발. 방아쇠가 매우 가볍기 때문에 나온 방식)를 장착하는 등 일종의 저격총 같은 성격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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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65 엽병용 소총 <출처: Public Domain>

 

 

또 1869년부터는 벡(Beck)이라는 기술자가 만든 개량이 M/62및 M/65에 이뤄졌는데, 구경이 13.6mm에서 12mm로 축소되고 탄약이 가벼워져 기존의 1인당 휴대량 75발이 95발로 늘었지만 내부에 고무 O링 등을 이용한 가스 누출 방지 개량이 적용된 덕분에 유효사거리는 오히려 늘어났다. 이는 프랑스의 샤스포 소총에 대항하기 위해 적용된 것으로, 덕분에 샤스포에 근접하는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제원(가장 널리 보급된 M62 기준) 

 

무게: 4.8kg

길이: 1.34m

구경: 13.6mm(1869년부터는 12mm)

총열 길이: 약 85cm

유효 사거리: 200m(점 표적)

가늠자 표시 최대 사거리: 527m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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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희범 | 군사전문지 편집장 

 

1995년 월간 플래툰의 창간 멤버로 2000년부터 편집장으로 출간을 책임지고 있다. 2008년부터 국군방송 및 국방일보 정기 출연 및 기고를 하고 있으며, <세계의 총기백과>, <밀리터리 실패열전> 등을 저작하고 <2차세계대전사>, <컴뱃 핸드건>, <전투외상 응급처치>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