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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에는 여군도 참전했다. 국난을 방관할 수 없다며 자진 입대한 이들이었다. 여자의용군 이복순 씨(87)는 당시 전방에서 활약했다. 그와의 인터뷰를 1인칭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사람들은 농담인 줄 안다. 내 말을 한 번에 믿는 이는 거의 없다.

 

나는 여든일곱 할머니다. 동네 어귀 의자에 앉아 볕을 쬐는, 어느 동네에나 있는 백발노인이다. 젊은 시절에 잰 키는 148cm였다. 나이가 들고 몸이 위축되면서 이마저도 더 작아졌을 것이다.

 

동네 지하철역까지는 걸어서 50분이 걸린다. 남들은 10분이면 가는 거리다. 척추부터 고관절까지 성한 곳이 없다. 열여덟 살에 당한 사고 후유증이 평생 나를 따라다녔다. 지팡이에 의지해 한 걸음씩 옮기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나는 6·25 참전용사다. 70년 전 육군 여자의용군에 자원입대한 군인이었다. 강원 정선의 끝없이 펼쳐진 눈밭 한가운데 소총을 매고 서서 눈물을 훔치던 소녀 병사였다. 해마다 눈 쌓인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시절이 오롯이 떠오른다.

 

● 군인이 된 17세 소녀

 

실눈을 뜬 채 수원시청 벽을 봤다. 똑바로 볼 용기가 없었다. 3일 전 시험장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면접관들은 내게 “키가 정말 작다”고 하더니 “이 논술 답안 정말 네가 쓴 거냐”라고 여러 번 물었다.

 

‘이렇게 작은데 뽑아줄 리가….’ 합격자 명단 벽보를 훑어 내려갔다. ‘106번 이복순’ 1950년 11월, 나는 육군 여자의용군 2기 시험에 합격했다. 열일곱 살이던 나는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불합격자들은 주저앉아 고무신으로 바닥을 치며 울었다.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는 이도 있었다. 지원자 중엔 인민군이나 그 편에 선 주민들에게 남편이나 아버지 등 가족을 잃은 이들이 다수 있었다. “총 들고 싸우겠다. 원수를 갚게 해 달라.”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통곡이 이어졌다.

 

개전 이후부터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수원도립병원 조제실에 몸을 숨긴 채 일했다. 인민군 편에 서라는 위협을 받고서였다. 병원 영안실엔 인민군 편 사람들 손에 죽은 주민 시신이 밀려들었다. 분노가 일었다. 그즈음 여자의용군 모집 소식을 들었다.

 

11월 말 어머니가 만들어 준 코트와 솜바지를 챙겨 입었다. 김소월 등 시집 3권을 품속에 챙겼다. 짐은 그게 다였다. 수원지역 합격자 50명은 트럭 2대의 짐칸에 나눠 탔다. 훈련소인 서울 일신국민학교로 향했다. 일찍 찾아온 혹한의 칼바람이 온몸에 파고들었다.

 

● “이슬같이 죽겠노라”

 

12월 1일 훈련이 시작됐다. 수도가 얼어 쌓인 눈을 얼굴에 비벼가며 세수를 했다. 새벽 6시부터 남산을 달렸다. 나는 사람 한 명이 더 들어갈 정도로 큰 남자 군복을 입고 뛰었다. 맹추위를 떨치려 목청 터져라 군가를 불렀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총이 없어서 나무 작대기로 훈련했다. 수류탄은 돌멩이로 대신했다. 제식훈련, 각개전투 등 훈련이 계속됐다. 늘 배가 고팠다. 나는 키가 큰 순으로 서는 대열 맨 뒤에 섰다. “니들 배 안 고파?” 여고생들처럼 소곤거렸다.

 

3주로 예정됐던 훈련은 12월 17일 일찍 마무리됐다. 중공군이 남진해오고 있어서였다. 훈련소는 부산으로 피란했다. 전황이 긴박해지자 전방에도 여군 일부를 배치한다는 결정이 났다. “일선(전방) 갈 사람?”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이듬해 1월 12일 여자의용군 1, 2기 중 130명이 전방의 3개 군단과 10개 사단에 배치됐다. 나는 1월 말 9사단에 합류했다. 훈련소 짐을 옮기다 늑골이 골절된 탓에 출발이 늦어졌다. 동기들은 “그 몸으로 어딜 가느냐”며 말렸다. 나는 “어차피 죽으려고 군대 온 것 아니냐”며 고집을 부렸다.

 

정선까지 가는 지프차는 눈길 위에서 연신 휘청휘청했다. 어린 시절을 따뜻한 일본 오사카에서 보낸 나는 그렇게 많은 눈이 쌓인 풍경을 처음 봤다. 눈 구경에 정신이 팔렸다. 끝없이 이어지는 하얀 눈밭을 보고 있자니 눈이 시렸다.

 

날이 어둑해져서야 사단본부에 도착했다. 무릎 높이만큼 쌓인 눈밭에 천막이 있었다. “신고합니다! 일병 이복순 명받아서 왔습니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저런 꼬마한테 뭘 시키나”하는 소리가 들렸다.

 

● 전방의 ‘꼬마병정’

 

인사과 사병계에 투입됐다. 9사단 29연대 병력 현황 파악이 임무였다. 병사 이름과 군번, 계급, 주소 등 신상정보를 연일 기록했다. 총 들고 싸우러 가는 줄로만 알았던 나는 조금 섭섭했다. 전방에 배치된 여군들에겐 주로 행정지원 임무가 주어졌다.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여군이 많았다.

 

후퇴와 전진은 수없이 반복했다. 한밤중 비상나팔 소리가 들리면 군장을 챙겨 재빨리 트럭을 탔다. 전장에서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나를 사람들은 지프차라 불렀다. 꼬마병정도 내 별명이었다.

 

중공군이 대거 진격해올 때면 꽹과리 소리와 나각(螺角) 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들리면 ‘오늘 많이 죽겠구나’ 생각했다.

 

2월 중순 어느 밤에도 비상나팔이 울었다. 인사과장은 내게 소총과 수류탄, 라이터를 줬다. 눈밭 가운데 서류 무더기가 있었다. 아군 정보가 담긴 기밀 자료였다. 그는 “한 장도 뺏겨선 안 된다”고 했다. 나와 문관 2명을 제외한 이들은 중공군 진격로를 차단한다며 급히 떠났다.

 

‘적군이 오면 서류를 태울 것, 수류탄과 총으로 대응할 것.’ 내 임무였다. “끝까지 사수하겠습니다.” 자신 있게 말했지만 총을 만져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눈 속에서 기약 없이 서있었다. 문관들은 줄담배를 피웠다. 하얗게 위장한 중공군이 기습해오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내가 전사하는 날이다. 내가 죽으면 부모님이 얼마나 슬퍼할까.’ 전사할 각오를 다지는데 눈물이 계속 났다. 무엇보다 포로로 잡히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그사이 동이 텄다. 해가 중천에 떠올랐고, 날이 저물었다. 내내 초긴장 상태였다.

 

밤이 돼서야 트럭이 왔다. 중공군 차단에 실패했다고 했다. 짐칸에 올라 후퇴하는데 옆 사람들 온기에 언 몸이 풀렸다. 졸음이 몰려왔다. 순간 ‘꽝’하는 소리가 났다. 몸이 붕 떠올랐다. 차 사고였다. 척추부터 꼬리뼈까지 부상을 입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 ‘작은 지옥’ 앰뷸런스

 

빈 농가에서 진통제를 먹으며 버텼다. 며칠이 지나자 앰뷸런스가 왔다. 전방 곳곳에서 태워온 부상병이 가득했다. 모두 피투성이였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차는 쉴 새 없이 덜컹거렸다. 그럴 때마다 다친 부위에 고통이 밀려왔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나와 영양실조에 걸린 동기는 10분도 지나지 않아 하차했다.

 

부대로 돌아갔다 “소총부대에 보내주십시오. 앰뷸런스 타고 가다 죽느니 적 한 명이라도 죽이고 전사하겠습니다.” 서러워 악을 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업무에 복귀했다. 앉을 수가 없어 서서 상반신을 엎드린 채 병력 신상 기록 업무를 했다. 4월에 있을 전군 현황 각개점호에 대비해야 했다.

 

부대는 삼척, 강릉 등 강원도 곳곳으로 이동했다. 5월엔 특별 휴가를 갔다. 부상한 몸으로 각개점호 임무를 끝낸 것에 대한 포상이었다.

 

휴가를 다 채우진 못했다. 휴가 간 사이 현리전투(1951년 5월 16~22일)가 벌어졌다. 3사단과 9사단, 7시단 병력이 후퇴 중 대거 전사했다는 소식이 수원까지 들려왔다. 동기들은 무사할까. 휴가가 남았지만 서둘러 짐을 꾸렸다.

 

9사단 여자 동기들은 입술이 다 터지고 얼굴이 새까맣게 됐다. 3사단 여자의용군 1명이 전사하고 3명이 실종됐다고 했다. 그런 난리 통에 휴가 간 것이 미안해 챙겨간 빨래비누로 동기들 군복을 빨고 또 빨았다.

 

여군 전사 소식은 이승만 대통령에게까지 전해졌다. 여군까지 죽게 하느냐는 질책과 여론의 비난이 있었다. 여군은 8월쯤 후방으로 철수했다. 총 한 번 쏴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흩어졌던 동기들은 부산 훈련소에서 재회했다. “살아서 다행”이라며 부둥켜안았다.

 

● 백발의 무명초들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다 1955년 이등상사(중사)로 전역했다. 결혼을 앞두고서였다. 동기들은 울며 나를 보냈다. 2남 1녀를 낳아 키웠다. 평범한 주부로 긴 세월을 살았다.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포로로 잡혀와 나를 노려보며 “미제의 앞잡이”라고 욕을 퍼붓던 북한 여군의 눈빛도, 얼어붙은 개울물을 돌멩이로 깨 세수할 때 살을 에던 느낌도.

 

사람들은 모른다. 그 시절 국난을 지켜만 볼 수 없어 여자도 군대에 갔다는 사실을. 힘을 보태려 애썼다는 사실을 말이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버거웠던 그때 나를 위해 눈 속을 걸어 군의관을 불러준 동기들은 아직 살아있을까. 그들도 다리가 아파 앉을 자리만 찾는 나 같은 노인이 됐을까.

 

돌이켜보면 우리는 참 소녀 같았다. 서로 쳐다만 봐도 웃음이 새어나왔던 소녀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군가를 불렀다. 여생에 바라는 건 없다. 다만 그때 나라를 지키려 나선 무명초 같은 여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알아준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

 

10년 후엔 여자의용군에 대해 증언할 사람이 없을 텐데…. 그것이 못내 걱정이다.

 

의용군 970명…6·25 참전 여군 1700명 넘어

6·25전쟁 당시 참전 여군은 육군 여자의용군 970명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1751명이다. 현지 입대 등으로 명단이 확보되지 않은 인원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 8월부터 육군 여자의용군 1기 모병이 시작됐다. 1기는 대구와 부산 지역에 한해 모집했다. 500명 선발에 2000여 명이 지원했다. 합격자 대부분이 교사, 중학교 이상 졸업자, 대학생이었다. 2기는 9월부터 전국에서 모집했으며 400명 가까이 선발됐다. 전쟁 기간 3, 4기까지 뽑았는데 1, 2기가 주로 참전 활동을 했다. 이들은 행정지원, 첩보, 정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여자 해병 75명, 항공병 26명, 간호장교 664명도 참전했다. 일부 여성은 유격대원, 예술대원 등으로 군번도 없이 참전했는데 확인된 인원만 600여 명이다.

 

 

손효주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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